smile⌒∇⌒
2008. 11. 1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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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에 오르다 |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 우리 「거시기산악회」는 모처럼 일상을 벗어나 멀고 높은 산에 오르는 등산을 했습니다. 일상이란 일요일 오전에 북한산 ‘포금정사’의 옛터까지 올라가 점심을 먹고 그냥 되돌아오는 등산입니다. 그런 틀에서 벗어나 광주광역시에 있는 유명한 무등산까지 등산을 갔습니다. 우리 일행 10여 명은 토요일 이른 시간에 고속버스로 광주에 내려가 곧장 무등산장으로 직행하여 보리밥으로 점심을 때운 뒤에 광주에서 합류한 몇몇 산우들과 동행하여 규봉(圭峯)까지 올라가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로 내려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행로였습니다.
산자락에 널따랗게 펼쳐진 갈대숲과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의 숲을 걷고 달리는 등산의 맛은 필설로 이야기할 길이 없었습니다. 천하의 영산인 무등산, 어찌하여 하늘은 땅위에 이런 훌륭한 산을 선사했을까요. 지금부터 200년도 훨씬 넘는 1778년 17세의 다산 정약용은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근무했기에 그곳에 머물며 화순 일대의 명승지를 구경하고 무등산(일명 서석산)에도 올라가 시도 짓고 기행문도 썼습니다.
“서석산은 험준하고 커서 7개의 군현(郡縣)에 걸쳐 있다. 정산에 오르면 북으로 적상산(赤裳山)이 바라보이고 남으로 한라산이 멀리 보인다. 월출산이나 송광산 같은 산은 모두 아들이나 손자 격이다. 규봉(圭峯)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규봉이라는 산은 두 봉우리의 깎아지른 모습이 마치 홀(圭)과 같은데 그 모서리가 사각형의 법칙에 꼭 알맞았다. 그리고 누운 것, 꺾인 것 등이 그 아래에 몇십 개가 더 있었다.”(遊瑞石山記)
우리가 돌아본 규봉의 모습을 어쩌면 그렇게 그림처럼 묘사할 수 있었을까요. 역시 다산의 글솜씨는 소년시절부터 뛰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무등산에서 가까운 곳에 그 유명한 적벽(赤壁)과 물염정(勿染亭)이라는 정자도 있습니다. 우리도 그곳을 찾았지만 다산도 그곳을 찾아 시도 짓고 기행문도 썼습니다.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鎭山)입니다. 현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무등산이 토해낸 역사적 사건들은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사였습니다. 다산이 결론으로 내린 무등산의 위용에 대하여 우리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산의 안목은 높기만 합니다.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巨人)과 위사(偉士)와 같아 말하지도 웃지도 않으며 조정에 앉아 비록 움직이는 흔적도 없되 그 공화(功化)는 사물에 널리 미치는 것과 같다”라고 했으니 무등산의 덕이 얼마나 높은가를 알만 합니다. 청명한 날씨가 아니어서 전체를 관망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다산이 관찰한 무등산에 우리가 동의할 수 있었던 것만도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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