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생시에 많은 이별의 슬픔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9세에 어머니 해남 윤씨(공재 윤두서의 손녀)와 사별하던 슬픔을 시작으로, 사별과 이별은 계속됩니다. 옥당에 들어가 유신(儒臣)으로 펄펄 이름을 날리던 32세에는 자신의 가장 큰 스승이던 아버지와도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1801년 40세이던 다산은 신유교옥에 의해 중형 약전과 유배 가는 길에서 또 슬픈 이별을 해야 했으니, 나주의 북쪽 ‘밤남정 주막거리’의 이별이었습니다. 동포형제로 서로간에 가장 가까운 지기이던 형님과의 이별은 아픔이 너무 컸습니다.
1802년 강진 유배지에서 막내아들 ‘농아’가 죽었다는 소식에 목놓아 울던 부자간의 사별은 슬프디 슬픈 이별이었습니다. 글로써 슬픔을 달래고 편지로 슬픔을 토로할 만큼 충격이 컸습니다. 1807년 47세의 다산은 17세로 피려다가 져버린 젊은 학자 정학초(丁學樵)의 죽음에는 또 한 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학연, 학유 두 아들보다는 침착한 성격으로 경학자가 되는 소질이 높았기에 더욱 슬펐고, 형님 정약전의 큰 아들이었으니 형님의 처지를 생각해서도 더욱 슬펐습니다. 「학초묘지명」이라는 글을 지어 학초의 죽음을 애도하고 자신의 불운을 한없이 한탄하였습니다.
학문을 좋아하더니 명이 짧아 죽었구나 하늘이 나를 축복해주더니 나를 망하게 했네 세상은 날로 더러워지는데 옛 성인의 도는 묵어만 가는구나 아! 하층의 인간들 주색에 빠지고 상층의 인간들 너무나 모만 나네 슬프다, 누가 내 책을 읽을 수 있으랴
자신의 학문 후계자로 믿었던 천재적 학자를 그렇게 빨리 앗아간 하늘을 원망해야 했습니다. 학초를 집안에 주어 축복해주더니 그렇게 쉽게 앗아가 자신을 망하게 한다고 한탄했으니 얼마나 비통한 이별이었나요.
1816년 흑산도에 귀양 살던 형님 약전의 부음은 이제 형제간의 영원한 사별이었습니다. 인생의 지기요, 학문토론자요, 선학이던 형님의 별세는 반쪽의 무너짐이었습니다.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학문 후계자, 학문 토론자의 상실이라 더욱 다산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런 아픔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 학문의 대업을 완성한 다산, 비애의 슬픔을 극복해야만 학문과 문학이 대성한다는 그런 선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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