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시절에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지위는 임금입니다. 임금 다음으로 높은 사람은 왕세자이거나 임금의 사위인 도위(都尉)의 지위일 것입니다. 정조대왕은 몇 아들과 딸을 낳았으나 제대로 장성시키지 못하고 오직 뒤에 순조로 왕위에 오르는 아들 하나와 해거도위(海居都尉) 홍현주(洪顯周)에게 시집간 숙선옹주(淑善翁主) 외동딸 하나만을 키워냈습니다.
풍산홍씨 노론 대가인 홍현주 집안이야 세상에 떵떵거리던 명문집안, 할아버지 홍낙성(洪樂性)은 영의정으로 영조 시절의 이름난 재상이었고, 큰형 연천 홍석주(淵泉 洪奭周)는 좌의정에 대제학, 둘째형 홍길주(洪吉周)는 벼슬보다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려 3형제가 정조시대와 순조시대를 빛낸 문사들이었습니다. 그런 임금의 사위 홍현주는 호가 해거재(海居齋)여서 해거도위라 부르기도 했지만, 영명위(永明尉)에 봉작되어 공식명칭은 영명위였습니다.
1800년에 정조가 붕어하고 벼슬길에서 멀어졌던 다산은 다음해에 신유옥사에 연루되어 18년의 귀양살이로 간난신고를 겪은 뒤, 1818년 귀향하여 한세월을 보내며 마지막 학문을 마무리하였습니다. 1831년이면 다산이 70세의 고희를 맞던 해인데, 이 무렵에 홍씨들 3형제와 가까워진 다산에게 하루가 멀다고 여기면서 해거도위가 서울에서 능내리 마현마을까지 찾아다녔습니다.
한양의 도성과 궁궐로 고개 돌려 바라보니 漢陽城闕一回頭 삼십년 세월이 유수같이 흘렀네 三十年光似水流 대궐의 의관에다 대궐의 술 마시니 宮樣衣冠宮樣酒 하얀 마름꽃 가을에 그대 찾아주어 고맙구려 感君來作白 秋
해거도위의 시에 화답한 다산의 시입니다. 벼슬길이 막힌 지 30년 세월, 도성이나 궁궐을 잊고 살던 다산, 임금의 사위가 궁궐의 옷을 입고 궁궐의 술을 가지고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으니 얼마나 감회어린 일이겠습니까. 「차운수해위(次韻酬海尉)」라는 제목의 시중의 절귀(絶句) 한 수입니다.
나이도 고희를 넘었고, 오랜 죄인과 야인의 생활로 세상에서 영원히 잊힐 뻔 했던 다산, 학문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고 고매한 인품이 소문이 나자, 귀공자 임금의 사위가 시골의 집까지 자주 찾아주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30대 중반의 ?고 패기에 찬 문사가 제자처럼 도와준 일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일입니다. 궁중의 귀한 음식까지 가지고 와서 대접했으니 노쇠해가던 다산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학자와 학문을 높이 여기던 해거도위의 높은 뜻이 훈훈한 온정으로 지금에도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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