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실

서태후의 쉼터 이화원

smile⌒∇⌒ 2010. 8. 2. 21:34

 

이화원.hwp

 

이화원 (頤和園)

이화원은 서태후의별장이라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있다.

일반적으로 황제의 이화원(頤和園)은 여름별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이(頤)는 고대의휴식, 요양의 의미였다.

화(和)는 화애롭고 평안하다는 뜻으로 이화는 통치에 반항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휴식도 매우 편안하게 즐길수 있다는 뜻이다.

1190년 금장종완안경시대에는 멀지않은 옥천산의 천수(泉水)를 만수산(당시는금산이라불렀음)아래로 끌어들였으며 아울러 이 하천을 금수하 (金水河)라고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그시기에 금산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양생지도(養生之道)를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그는 산 중턱에서 오목하게 들어간 매우 큰 암석 하나를 발견해 파 헤쳐 보니 고대의 독항아리가 하나 있었다. 주위에서 발견된 꽃무늬의 조각은 모양이 흐릿하여

분명하게 식별할 수 는 없었지만 항아리에는 수십 종의 물건이 보존되어있었다.

그는 이 물건을 갖고 떠나기 전 금산의 서쪽에다 옮겨놓고 석옹사제리(石瓮徙帝里)라는 진어를 남겨 두었다.

명나라가 청(淸) 년간 에 이 돌 자기가 돌연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명조도 쇠퇴해 갔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황당무제한 전설이고 미신적 색체가 농후하지만 당시는 이일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며, 이 때문에 금산을 옹산으로 고쳐 불렀다.

서태후는 중국3대여걸중의 한사람으로 야심많은여자 로 기억하고 있으며 조선의 명성황후 라고도 볼수 있다는 여결이라고 한다. 서태후의 이화원배경이 궁금하다.

1888년 서태후는 자신의향수를 위하여 광성의 명으로 해군을 창설하려던 3,000만량의 은을 도용하여 만수산 앞산에 재 건축을 하였으며 청의원을 이화원으로 고쳤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의 침략으로 원내의 건축물이 대부분 불에 탔고 약탈당했다.

서태후는 서안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화원을 재건립하도록 명하였다.

이화원은 1750년부터(청 건륭황제15) 지금까지 250년 동안 전통원림으로 황가어원(皇家御苑)으로,13억 인민 놀이터로 매년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람명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화원은 만수산과 곤명호로 조성되었으며, 주로 정치활동구, 생활거주구, 풍경유람구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풍경유람구는 만수산의 앞산, 뒷산, 곤명호로 구분되어있다.

이화원중에서 가장 훌륭한 원은 비취원이며 그다음은 구불구불한 장량(長郞)이라 할수 있다.

높이59m의 만수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곤명호는 매우 아름다우며, 불향각을 비롯한 많은누각들이 있으며 뒤쪽에 7층16m의 다보유리탑이 있는데 7가지 자기로 만든 색깔과모양이 화려하다고 한다.

불향각 아래 곤명호 북쪽기슭을 따라 728m의 장랑이 팔각정4채를 연결하고 있으며 장랑의천장에는 아름다운 경치 8,000여점의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 발길을 사로잡았다.

장랑이 끝나는 곤명호 북쪽에는 서태후가 비가 오는날 나와 앉았다는 돌로 만든 배가 금방이라도 물결을 헤치고 나아갈듯 보였다. 석방(石舫)이라는 돌로만든 배로 2층의누각이 있으며 길이가 24m정도되는 서태후가 차를 즐겨 마셨던 장소라고 한다.

 

이름대로 이화원은 중국의원림 정원이다. 중국인들은 정원에 자연과 조화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의 정원에는 산과물이 존재한다. 이화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만수산은 양을 표현 그 아래 곤명호는 음을 상징한다고한다.

우리조선의 정원인 소쇄원도 조선의 대표적인 정원이지만 정말 중국은 소쇄원의 몇 배가 되니 할말을 잃을 정도이다.

십칠공교

십칠공교는 남호도와 곤명호 동안(東岸)을 잇는 한백옥(漢白玉)다리이다.노구교를 모방하여 지었으며길이는 15m,폭은 8m이다 각각의난간기둥마다 돌사자가한마리씩 총 544마리가 조각되어있으며17개의아치가있다.

남호도

남호도는 곤명호 최대의섬이며 일지삼산(一池三山)의 원림 조성규칙에따라 건설되었다.

일지삼산이란 전설속의 바다인 발해에 있는 세 곳의 선산(仙山 )을 의미 하는 것으로

이곳에는 온갖 기묘한 동식물들과 불로불사의 명약이 있다고 한다.

불사약을 얻고자 진시황은 이곳을 수차례 원정 파견 하였으나 끝내 실패 하고 그의 노력이 헛되었음을 깨달은 후대의 황제들은 선산을 찾기보다는 일지삼산을 건설하여 위안을 삼았다.

석방

원래명칭은 청연방(淸宴舫)으로 이화원최고의 수상 건축물이다

선채전부를 대리석으로 조각하였으며 석방은“물은 배를 떠받칠수 있으나 뒤집을수는 없다”라는의미에서 제작되었다.

2층 창루는 서태후에의해 추가된 것으로 큰거울이 하나씩 배치되어 비가올때 서태후는

거울앞에앉아 차를마시며 거울속에 비친 풍경을 감상했다고한다.

장랑

장랑은 낙수당 좌측의 요월문(邀月門)에서 만수산 서쪽의 석장정까지를 연결하는 728m의

긴희랑이다. 길고 구불구불하여 흡사 용이 누워있는것 같은 장랑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뿐아이라 이화원의 명소들을 연결하여이곳을 따라걷기만 하면 되는 관람터널의 역할도 하고있다.장랑 중간중간에 청요, 추수, 기란, 유가 라고 하는 네곳의 정자가있어 춘하추동 사계절을 상징한다고한다. 또한 대들보마다 소주식 채색화들이 그려져있어 민간전설이나 고전문학, 희극등을 주제로 하였는데 그수가 무려 1,4000점에 달해 관람객들을 놀라게한다

불향각

이화원의중심에 위치한 이화원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건륭15년 대보은연수사 건립시 건축되었다. 원래는 이곳에 9층자리 연수탑을 짓는것이 목적이었으나 봉지정의 건설로 계획이 수정되어 총3층의 불향각이 건설되었다

 

 

 

출처:[알짜배기세계여행시리즈북경 - 남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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