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히히호호

[스크랩] 가끔 따분하고 지루한 영화가 보고 싶을때

smile⌒∇⌒ 2010. 6. 30. 16:52

 

나는 잘 감동하고 매우 감성이 풍부한 스타일은 아닌데, 아주 가끔 센치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한 액션영화나 코미디 영화를 보기 보다는 재미없고 따분한 영화나 아주 슬픈 영화를 찾게 되더라. 그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거다. 그런 감정의 상태를 나름대로 즐길 줄 알거나, 그 감정을 극대화해서 빠른 시간 안에 소모시켜 버리고 원상 복귀하려는 일명 자학 테라피의 시도이거나. 뭐가 내 경우인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은 정말 뜬금없게도 비포 선셋 (Before sunset)을 봤다. 사실 뜬금없는 것은 아니고 이 영화의 주인공 줄리 델피 (Julie Delpy)가 영화 말미에 부른 “A waltz for a night”을 오후에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다.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obuV1KrvEYo

어쨌든, 비포 선셋은 기대보다 괜찮았다. 2년전 본 비포 선라이즈보다 좀더 쉽게 쉽게 받아들여졌다. 이 이유 역시 두 가지 일 것이다. 우선, 20 대에 만났던 두 사람이 나와 비슷한 나이에 만나 공감할 수 있는 30대의 현실적인 고민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 평론가 오동진씨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진짜 사랑은 늘 엇갈리게 되어 있으며 너무 늦게 만나게 되는 셈이거나 혹은 새롭게 사랑을 만들어 가기에는 이미 지나치게 복잡한 관계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는 것을 축약적으로 보여준다.”  매우 적절한 정리다. 그의 말처럼 이 영화는 이 세상 연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정서를 보여주는 리얼리즘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 영화 구성 상 비포 선셋이 좀 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을 보여주기 위해 빠른 템포로 전개됐기 때문이다.  비포 선라이즈에서의 다소 늘어졌던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가 한결 간결하고 직설적 이었다. (어쩌면 내 잉글리쉬 리스닝 실력이 지난 2년간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을 수도 있겠다.  ß 희망사항임)  

이게 사실 참 어려운 건데, 감독은 무지하게 단순한 스토리를 관객의 동감을 얻을 만한 대화와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심리묘사를 통해 효율적이고 짜임새 있게 구현했다. 현실적이고 간결한 대화와 세밀한 표정 변화들로 구성된 80분이라는 제한 시간. 시간 제한 스포츠가 주는 적절한 긴장감을 여기서도 느낄 수가 있다. 개인적으로 비포 선셋의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이다.

~ 그에 반해 비포 선라이즈를 보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남녀간의 하룻밤 동안의 만남을 그 흔한 정사장면 하나 없이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참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전자 보다 더.

둘의 운명적인 낭만의 시작은 사실 비현실적이었다. 기차에서 옆에 앉은 부부의 다툼소리를 피해 제시 옆으로 자리를 옮긴 셀린느, 그런 셀린느를 보며 유럽의 열차 안에서 영어로 질문을 던지는 제시조금은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설정이다. 제시의 달콤한 작업성 농후한 뻐꾸기와 교양 있는 듯이 내뱉는 셀린느의 멘트들. 그러다 손이 닿고, 어깨가 닿는다. 그리고 입술이 닿는다. 그러면 그렇지~. 이 정도면 남녀간 사랑영화의 다음 장면은 안 봐도 비디오다.

? 근데, 둘이 안 자는 거다.

여기서는 자야 하는데, 이젠 자겠지 내내 중얼거리며 기다렸지만, 잘 듯 하다가도 안 자고, 또 안 자고. 놀랍게도, 결국 둘은 영화상에서 끝까지 안 잤다.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둘이 잤으면 이 영화는 유치찬란하고 어설픈 철학으로 점철된 삼류 연애 소설이 됐을 것이다.

다시 비포 선셋으로 돌아가서 사실 영화만 놓고 볼 때 비포 선셋은 전편인 비포 선라이즈보다 분명 더 공감이 가고 세련됐다.  그런데 난 비포 선라이즈의 낭만이 더 좋다. 단순히 비현실적인 사랑이 낫다기 보다는 현실의 장벽을 지레 의식하는 것 보다 감정에 충실하는 것이 더 진실되다고 아직은 믿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매우 힘든 것임을 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결론이 없다. 해질 무렵 파리에서 뉴욕으로 떠나는 비행기 시간이 얼마 없음에도 셀린느의 집까지 따라가 그녀의 노래 바로 이 “Waltz for a night”을 듣고 마는 제시. 노래가 끝나고 그런 제시를 바라보는 셀린느. 비포 선셋의 마지막 두 사람의 짧은 마디의 대화는 꽤나 긴 여운이 있다.

셀린느: 비행기 놓치겠어.

제시: 알아.

제시는 남았을까 떠났을까?

 

 

출처 : Chicago (시카고)
글쓴이 : 산여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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